미국 AI 영상 생성 플랫폼 스타트업 힉스필드(Higgsfield)가 아시아 첫 거점을 도쿄나 싱가포르가 아닌 서울에 세웠다. 지난 5월 서울에 부임한 김민성 아시아태평양(APAC) 디렉터는 국내 첫 인터뷰에서 그 배경을 K팝·드라마·광고·웹툰 등 시각 콘텐츠 의존 산업의 밀집도와 해외 진출을 전제로 한 수요에서 찾았다. 힉스필드는 자체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드는 대신 여러 영상·이미지 생성 모델을 한 플랫폼에 통합해 제공하는 방식으로 한국 기업들의 해외향 콘텐츠 제작 속도를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해외 진출 전제의 콘텐츠 수요, 서울을 첫 거점으로 만들다
김 디렉터는 “K팝, 드라마, 광고, 웹툰까지 시각 콘텐츠에 의존하는 산업들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고, 이 산업들이 이미 글로벌 플랫폼을 겨냥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 진출을 전제로 한 시각 콘텐츠 수요가 원래 높은 나라인데 여기에 생성형 AI가 제작 속도의 병목을 풀어주면서 채택이 급격히 빨라졌다”고 설명했다. 15년 넘게 마케팅 업계에서 일해 온 김 디렉터는 튠, 오페라 미디어웍스(현 애드콜로니), 싱귤러를 거쳐 국내 애드옵스 기업 아드리엘의 부대표를 지낸 뒤 힉스필드에 합류했다.
김 디렉터는 한국 시장의 잠재력을 이렇게 짚었다. “한국이 인공지능(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자체에서는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다소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델을 활용하는 역량에서는 한국이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 6월에는 국내 광고·마케팅 그룹 FSN의 계열사인 부스터즈와 애드쿠아가 힉스필드를 도입했고, 지난 8월에는 코엑스 AI 서밋에도 참가해 국내 인지도를 넓혔다.
국내 기업 도입, 얼리어답터에서 대기업 정식 검토로
김 디렉터는 “게임, 전자, 커머스,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패션까지 계약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대기업급 문의가 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는 흐름이다. 그는 “최근에는 컴플라이언스와 법무 검토까지 필요한 대기업급 문의가 늘고 있는데, 시장이 얼리어답터의 실험에서 대기업의 정식 도입 검토로 단계가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본다”고 말했다. 현재 힉스필드는 6개 대륙 1만2000여 개 기업이 사용하고 있으며, 전체 활동 중 상업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 달한다.

여러 모델을 하나로, 오케스트레이터 전략
힉스필드는 바이트댄스의 시댄스, 콰이쇼우의 클링, 오픈AI의 소라, 구글의 Veo 등 영상 모델 7종과 이미지 모델 4종, 총 11종의 모델을 플랫폼에 탑재해 기업이 원하는 결과물에 맞는 모델을 자동으로 선택해주는 ‘슈퍼컴퓨터’를 제공한다. 김 디렉터는 이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나노 바나나 프로가 대세였고 올해 초는 클링, 지금은 시댄스가 인기”라며 “특정 원 모델사 하나에 고착화되어 있으면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용자가 직접 각 엔진을 붙여 쓸 때는 얻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기업용 광고 소재 생성 제품인 ‘마케팅 스튜디오’는 공개 첫 30일 동안 6만8000명의 마케터를 모집했다. 김 디렉터는 “측정 데이터를 들여다볼수록 확인하게 된 건 크리에이티브 자체가 성과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사실이었다”며 “성과는 매체 집행이나 타겟팅보다도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에서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글로벌 표준화의 한계도 인정했다. “글로벌 플랫폼은 수백 개 국가와 수많은 산업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해 구조적으로 표준화된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게 글로벌 솔루션이 지는 지점이라면 지는 지점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툴의 정체성은 회사가 규정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목적이 규정한다”고 강조했다.
커진 몸값, 숫자로 보는 힉스필드
힉스필드는 공동창업자인 전 스냅 생성형 AI 리더 알렉스 마슈라보프와 에르자트 둘라트가 세운 회사로, 올해 1월 13억 달러였던 기업가치는 지난 8월 미래에셋캐피탈이 참여한 시리즈B에서 4억 달러를 유치하며 54억 달러로 뛰었다. 8개월 만에 네 배 이상 오른 셈이다. 연환산 매출은 7억 달러, 사용자는 238개국 3000만 명에 이르며 포춘 500대 기업 중 390곳이 힉스필드를 사용하고 있다.
시장 규모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그랜드뷰리서치는 올해 AI 영상 생성기 시장 규모를 9억4600만 달러로 추산했고, 편집·워크플로까지 포함한 메티큘러스리서치 집계는 36억7000만 달러에 달한다. 이 조사기관은 2036년 이 시장이 248억9000만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키온·제피어는 쇼케이스일 뿐, 콘텐츠 사업 진출 계획 없어
힉스필드는 캐릭터와 톤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자체 기술 ‘소울(Soul)’을 적용해 AI 아이돌 ‘키온’과 AI 걸그룹 ‘제피어’를 만들었다. 제피어는 5일 만에 제작됐다. 다만 김 디렉터는 이를 콘텐츠 사업 진출로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K팝이든 영화든 콘텐츠 시장에 직접 진출할 계획도 의향도 없습니다. 키온과 제피어는 이 플랫폼으로 실제로 무엇까지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자체 실험이자 쇼케이스였고, 상업적 목적을 위한 자체 제작을 계속 이어갈 계획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힉스필드는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플랫폼을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저희의 역할은 이 플랫폼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하는 크리에이터와 제작사를 지원하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5일 만에 만들 수 있다는 건 제작의 병목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좋은 콘텐츠가 자동으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모든 콘텐츠에는 결국 서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영상 제작 시장은 수준 높은 결과물과 생산성이 결국 자본의 논리에 비례하는 구조였다”며 “제작 과정이 간소화돼도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역량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도 했다.

IP 책임과 한국 규제 대응은 진행형
생성물의 초상권·저작권 등 법적 책임 소재에 대해 김 디렉터는 “제작물의 활용과 그로 인한 법적 책임은 실제 제작 주체에게 있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1월 22일 시행된 한국 AI 기본법이 요구하는 생성물 표시 의무 등 로컬 규제 대응에 대해서는 “검토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한국 시장에 한해 별도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로서는 표시를 자동으로 삽입하는 기능은 없는 상태다.
서울을 아시아 첫 거점으로 삼은 힉스필드가 국내 광고·게임·전자·커머스·패션 업계와 계약을 늘려가면서, 해외 진출을 전제로 움직이는 국내 시각 콘텐츠 산업이 제작 속도의 병목을 얼마나 더 줄일 수 있을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