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벤처캐피털(VC) 40곳과 첫 미팅을 하고도 텀시트(Term Sheet·투자 조건을 정리한 문서)를 한 장도 받지 못한 한국 비상장 법인의 미국 투자유치 경험담이 나왔다. 칼럼 '글로벌 생존기'의 필자 Venture Insider는 40번의 미팅 가운데 서른일곱 번이 같은 질문, 곧 투자금을 어떻게 회수(Exit)하느냐에서 끝났다고 돌아봤다. 필자는 20년 이상 글로벌 마케팅·사업개발·해외 영업·IR을 해 왔고 AI·딥테크 기업의 미국 투자유치를 이끈 사람이다.
필자가 콜드메일을 보낸 미국 VC는 180곳이었다. 이 중 90곳이 답을 해 답장률은 50%였고, 실제 첫 미팅은 40곳과 했다. 그러나 텀시트는 한 장도 받지 못했다.
미국 VC가 던진 첫 질문과 막힌 대목
미팅에서 상대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회사 소개가 아니었다. 필자에 따르면 투자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왜 귀사에 투자해야 합니까?”
이어 투자자들은 회수 배수를 따졌다. “우리가 투자하면 몇 배로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필자는 “10배 정도로 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상대는 “어떤 근거로요? 어느 회사가 어느 매출에 어느 멀티플(Multiple·매출 대비 기업가치 배수)로 인수한다는 가정입니까?”라고 되물었다.
필자가 말한 10배에는 구체적인 계산이나 근거가 없었다. 그 뒤로 기술에 대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질문이 멈췄다는 것은 우리를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더 알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라고 적었다. 필자 쪽은 피치가 부족한지를 고민했지만, 투자자가 실제로 물은 것은 투자한 돈이 어떤 경로로 몇 배가 되어 돌아오는지였다.
가정 사례로 본 회수 계산
필자는 실제 수치가 아닌 가정 사례를 들어 10배 회수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 보여준다. 기업가치(밸류에이션) 500억 원에서 50억 원을 투자받으면 투자 직후 지분율은 10%다. 이후 지분이 희석돼 Exit 시점에 6%가 된다고 가정한다.
이 경우 투자금 10배인 500억 원을 회수하려면 회사가 약 8,300억 원 이상에 팔려야 한다. “구글이 인수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명만으로는 이 계산이 채워지지 않는다. 필자는 이 계산이 막히는 지점이 지금 회사의 가장 약한 고리이고, 투자자의 질문도 그 자리에서 멈춘다고 썼다.
미국 투자유치의 네 개의 벽
필자가 겪은 미국 VC 미팅에서 투자자는 정해진 순서로 네 개의 벽을 확인했다. 첫째는 Exit, 둘째는 법인 구조, 셋째는 투자 실사(Due Diligence), 넷째는 밸류에이션이다. 투자 실사는 기술·사업 성과를 계약서·재무자료 등 문서와 숫자로 검증하는 절차다.
법인 구조에서는 한국 법인이라는 점이 걸렸다. 한 투자자는 “미국 회사가 아니면 투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 법인만 만들면 되는지를 고민했던 필자 쪽과 달리 투자자는 실제로 투자하고 회수할 수 있는 법적·사업적 구조인지를 확인하려 했다.
필자 회사는 미국 델라웨어주에 주식회사 법인을 세워 기존 한국 회사의 지배구조를 전환하는 플립(Flip)을 두 달 동안 검토했다. 델라웨어 C-Corp는 미국 투자유치에 자주 쓰이는 법인 형태다. 직접 비용 견적은 약 2억7,000만 원이었다. 플립이 끝나면 투자가 확정되느냐는 질문에 그 투자자는 “적극 검토하겠다”고만 답했고, 투자 확정 약속이 없어 플립은 진행하지 않았다.
다시 한다면 순서를 뒤집는다
필자는 다시 미국 투자유치에 나선다면 순서를 뒤집겠다고 했다. 먼저 미국 고객과 단위 경제를 확인하고, 다음으로 회수 경로를 계산한 뒤 법인 구조를 정한다. 그다음 자료를 사전 점검하고 밸류에이션 범위를 잡는다. VC 리스트는 180곳이 아니라 20곳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첫 미팅 전에는 투자자의 돈이 어떤 경로로 몇 배가 되어 돌아오는지를 한 장의 계산으로 만들라고 권한다. 이를 위해 인수 후보 기업 열 곳을 꼽고 각각 인수할 이유와 인수하지 않을 이유를 한 줄씩 써 보라는 것이다. 필자는 10배라는 숫자에 근거가 있어야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된다고 설명했다.